멜로/로맨스, 드라마, SF 미국 107분 , 2005. 11.10 개봉

감독 : 미셸 공드리

출연 :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사랑은 그렇게 다시 기억된다..

 

외국로맨스 영화 중에는 이터널 선샤인을 가장 좋아한다. 일단 주연배우 둘 다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정말 영화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내용도 모른채 영화를 봤다가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웃음기를 쫙 빼고, 실연당한 모습의 짐 캐리를 보는 건 정말 신선했고, 케이트 윈슬렛의 자유분방한 모습도 좋았다.

 

영화는 '망각', '기억'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이전에 소개했던 영화 중경삼림과 봄날은 간다 와는 다르게, 이영화는 사랑은 또다시 온다 가 아니라, 기억은 삭제돼도 마음은 남는다는 이야기이다.
망각이라는 건,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럴까, 망각한 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이 하나쯤 생긴다. 아니 많이 생긴다. 처절하게 헤어졌던 기억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늘로 보내야 했던 수많은 아픔의 기억들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지워지면 행복해 질까? 이 영화는 그 물음에 대한 이야기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만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헤어졌는데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사람과의 좋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랬다. 한때는, 그사람과 나도 행복했었다. 그렇게 나쁘게 헤어졌음에도, 그렇게 아팠지만, 분명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조엘이 잠에서 깨면서 시작한다. 어쩌면 이 장면의 마지막의 장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다시 첫 부분을 보게 된다.
잠에서 깨어난 조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살아간다. 출근을 위해 나왔다가, 충동적으로 몬톡행 열차를 타버린다. 그리고 파란 머리의 클레멘타인을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강한 이끌림을 받고, 밤새 데이트를 한다. 사실 이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평소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했던 클레멘타인은 자신과는 반대의 성격인 조엘과의 지루한 관계에 불만을 느끼고, 조엘 역시 그런 클레멘타인이 탐탁지 않다.
그렇게 둘은, 사랑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설렘과 아름다움은 잊은 채, 다툼이 늘어간다. 모든 오래된 연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영화에서는 기억을 지워주는 센터 '라쿠나'가 있다. 클레멘타인은 조엘과의 다툼 후 라쿠나에 가서 조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걸 알게 된 조엘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다.

 

화가 난 조엘도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라쿠나에 방문하고,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워나간다.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첫 만남까지 간 후,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있도록 되어있다. 영화에서는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조엘이 지우는 것만 나온다. 그래서 사실 클레멘타인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영화는 조엘의 기억을 따라 올라간다.

 

 

헤어질 때의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오렌지색이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전혀 다른 성격이다. 조엘은 이제 그런 클레멘타인이 귀찮았다. 오렌지색일 때, 오래된 연인의 권태기 모습들이 나온다.

 

 

가장 사랑하는 순간일 때, 그녀의 머리색은 붉은색이다. 왠지 오렌지색은 그 붉은 마음이 바랜 색 같기도 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의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려고 붉은색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엘은 가장 사랑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클레멘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이었는지를.. 지겹게만 느껴졌던 그 관계가 한때는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깨달으면서 기억을 지우는 것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것을 멈추기 위해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하지만, 결국 기억은 첫 만남 때로 돌아간다.

 

 

첫 만남 때의 클레멘타인은 초록색의 머리였다. 그것은 풋풋하고 싱그러운 시작을 상징하는 색이었을까.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잊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잠에서 깬 조엘의 기억은 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기억이 지워진 상태로 또다시 만나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기억이 지워져도, 결국은 다시 만나는 것, 결국은 운명이라는 것, 서로가 서로를 지웠고, 다시 사랑해도 또다시 헤어지고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둘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나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편이었는데, 두 주인공의 용기가 멋졌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사람과의 이별이 떠올랐는데, 처음에는 나도 라쿠나에 가서 그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조엘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나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결국 그렇게 된 것은 그냥 인연이 아녔음을, 아팠던 만큼 좋았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음을 그렇게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 인연이라면 분명히 다시 만날 거라는 걸 느꼈다. 아픔이 지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는 좋은 기억만 남아서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고, 살면서 간직할 추억거리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마, 그 사람과 결혼을 했었더라면 익숙함에 소중함을 잃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때로는 추억으로 남겨둬야 가끔씩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어 볼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 가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아련하게 떠올려볼 수 있는 좋은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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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은 1994년 개봉이니 내가 거의 아기 시절에 개봉한 영화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영화는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세련미와 퇴폐미가 더해서 몽환적인 느낌마저 준다. 사실 찾아보지 않고서는 홍콩영화 인지 중국 영화 인지 아직은 헷갈린다. 그래서 '인생', '첨밀밀', '폐왕 별희', '아비정전', '무간도', '마지막 황제' 같은 명작들이 어디 영화인지 아직 헷갈리긴 하는데, 감히 1등을 주기는 조금은 망설여지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중화권 영화에서 손에 꼽을 명작 중에 하나이다.

 

영화는 두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이야기지만 무언가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다. 두 남자의 이별 이야기다. 솔직히 두 남자 주인공은 너무 잘생겨서 실연당했다기엔 비현실적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땐 중국 남자들이 이렇게 훈훈했나 하면서 두 남자의 얼굴만 봤던 것 같다. 아무튼 각설하고 두 이야기 모두 좋아서 어떤 이야기가 더 좋다 할 게 없는 게 이 영화의 흠이다. 영화는 가볍게 보면 이별 후 찌질대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볼 수 있지만, 무겁게 보면 또 한없이 무거워지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볼 때마다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고, 이영화 역시 나이가 들어가며 보는 느낌이 다르다.

 

-우리 서로가 매일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언제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은 하지무 경찰이며, 넘버 233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시작과 첫 대사 이다. 넘버 233은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30일 안에 그녀가 오지 않으면 잊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오지 않는 메시지를 기다리고 팔지않는 통조림을 사러 다닌다. 강아지와 이야기를 하고 닥치는 대로 전화도 걸어본다. 그래도 그의 외로움과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5월 1일이 오고, 파인애플 통조림을 다 먹어치우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도 가끔은 예민해 질때가 있다. 그래서 항상 레인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다. 비가 어느 때 올지 언제 화창할지 모르니까..

이름도 나오지 않는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역의 여자이다. 이 여자는 홍콩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약밀매를 하고 있는데, 당시 홍콩 사회의 시대 배경과 비슷했다고 한다. 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으나, 그녀는 항상 저렇게 변장을 하고 다닌다.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둘은 바에서 만나게 된다.

 

 

넘버 233은 이렇게 찌질하게 말을 걸고 노랑머리 여자에게 헤어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당신을 알고 싶다고 한다. 233은 그 누구와라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둘은 함께 밤을 보내지만, 233은 그저 그녀의 불편한 구두를 벗겨주고 닦아주고 혼자서 샐러드를 먹고 방을 나섰다.
결국 둘은 이루어질까? 그것은 열린 결말이다.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별개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사람이 내일은 다른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지.

 

그리고 시작되는 두번째 이야기

 

The Mamas & Papas의 California Dreaming과 함께 등장하는 제복 입은 양조위의 등장은 정말 너무 멋있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주인공 또한 양조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일을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샐러드 가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저 가게는 지금은 편의점이 되었다고 한다.) 경찰 633은 예쁜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에게 주기 위해 매일 밤 샐러드를 사 간다.

 

 

그러던 어느날 633은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고,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고 결핍을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의 공간인 집안에서는 넘버 233과 같이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밖에서는 멋진 경찰 제복을 입은 남성으로서 보이지만, 집안에서는 나시와 팬티만 입고 다니며 비누, 곰인형과 대화를 하고, 그녀가 남긴 물건들을 보며 그리워하고 또 외로워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짝사랑하는 여자 페이, 삼촌 가게에서 일을 하던 페이는, 633을 향한 조금은 무서운 짝사랑을 시작한다. 633의 전여자친구가 두고 간 집 열쇠 키를 들고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물건들을 바꿔놓는다. 그녀의 꿈인지, 실제로 하는 건지 약간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행위를 이어간다.

 

 

물고기를 채우고, 잠못드는 그를 위해 물에 수면제도 타 주고, 청소도 하고,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드나들면서 지금이었으면 거의 범죄 수준이긴 한데, 이로 인해 633의 내면이 다시 평온해지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633은 그런 페이를 보면서 치유받고 있었던게 아닐까, 방에 감정이 생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집에 침입한 페이를 보고도 633은 화는 커녕 그녀를 재워주고 데이트 신청까지 한다.

 

 

 

페이와 바에서 만나기로 한 날, 633은 전 여자 친구와 마주치게 된다. 물건을 가져가도 된다는 633의 말에 전 여자 친구는 그냥 버리라고 한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외로워했던 그녀의 물건은 그녀에게는 그저 버릴것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새 남자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짓던, 양조위의 씁쓸하고 허무한 미소..

페이와 633은 이루어 질까. 그들은 데이트를 하고 만나게 될까? 그것 또한 열린 결말이다.


실연으로 인한 결핍은 결국 다음을 위함이다. 이영화에서도, '봄날은 간다'에서도 '500일의 서머'에서도 그것은 같다. 아픔이 지나가기 위한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꼭 반드시 무언가가 다시 온다. 다시 채워지리라. 다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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